중국어를 번역합니다. 주로 단메이(耽美) 소설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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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https://www.jjwxc.net/onebook.php?novelid=5385134&chapterid=1

 

魔尊只想走剧情 (마존지상주극정)

: 마존은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을 뿐이다.

 

문안

 
방려(方黎)는 한 막장 소설의 총알받이 마존 공에 빙의하였다. 무공이 고강한 데다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한 마존은 수선계(修仙界)에 비바람을 부르는 등 포악한 패도(霸道)의 길을 걸었으나⋯⋯, 모든 이들에게 흠모를 받는 주인수를 첫눈에 반한 채로 강탈했고,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질 정도로 강압적인 사랑의 이야기에 엄청나게 많은 기여를 했다.
 
이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읽으면 그만이지, 내가 여기서 등장하는 건 절대로 안 돼.
 
방려: 난 안 될 것 같은데.
시스템: ⋯⋯.
 
 
 
방려는 문을 나서자마자 흑색으로 가득 찬 마수[각주:1]들이 아득히 보이는 선문을 물샐틈없이 에워싸는 와중에, 운간궐(云間闕)의 수많은 제자들 중 선두에 있는 남자가 바람을 맞으며 고독히 서 있는 채로 검 끝을 자신의 방향을 향해 가리킨 모습을 보았다.
 


범할 수 없을 것처럼 고결하고도 세상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그 남자를 본 방려는 피에 젖은 흰옷과 장검을 멀리 바라보더니 잠시 망설였다. ⋯⋯ 그는 갑자기 안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수선계의 제일가는 하늘의 총아인 운간궐의 옥의군(玉義君)은 자신의 뒤에 있는 종문(宗門) 제자를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냉혈하고도 잔혹한 마존에게 복종해야 했다. 이런 적선[각주:2]이 그 마두[각주:3]에게 갖가지 치욕스러운 학대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수선계 전체가 손목을 꽉 쥐고 탄식하였으며 흐느낌이 그치지 않았다.



미인을 데리고 돌아온 방려는 비록 취향이 맞지 않은 이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긴 했으나,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방려는 '강압적인 사랑'을 대강대강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에 드는 주인수의 흠모자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그들이 감정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만선맹(萬仙盟)이 부구산을 공격한 그날, 방려는 극을 끝내고 죽음으로 가장하여 도망쳐 떠나는 데에 성공했다.



다시 태어났을 때는 이미 9년이 지난 후였다.

그가 마존이었을 시절 쌓아 올린 경험과 새로운 신분으로 이 세계에서 새로운 생활을 잘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이미 천하제일인이 되어 있는 주인수를 맞닥뜨렸다.

맑고 서늘한 남자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눈 속에 의미 모를 광기가 한 가닥 감도는 그 사람은 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존상께서는 또다시 어디로 도망갈 생각이십니까?"

방려: ⋯⋯ 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거야?

#마존수 #강공강수 #각별한애정 #소설빙의 #먼치킨물 #가벼움

 
 

마존은 살려는 의지가 없다.

 
 
차디찬 겨울. 고개를 들어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는 녹령산맥을 멀리서 바라보면, 온통 새하얗고 길게 이어져 있는 데다가 하늘가에 뻗은 것이 마치 온 하늘과 하나인 것처럼 어우러졌다.
 
산기슭에는 드문드문하게 농가가 있었다. 하늘이 아직 밝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집집마다 모두 물로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깨끗하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로 산 아래의 빈터에 모여 녹령산 위에서 내려온 선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매년 대한(大寒)에는 선인들이 모두 내려와 제사를 지내고 마을사람들을 도와 추위를 막는 법진을 설치하였으며, 겨울을 견딜 음식을 조금 나눠주기도 했다.
 
여태까지 이곳의 겨울은 길어서 선인들의 비호를 얻어야만 힘들게 견디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녹령산 위에 있는 선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경건하게 기다렸으나⋯⋯, 해가 질 무렵이 됐음에도 선인들이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일곱 여덟 살이 되는 여자아이가 꽃무늬가 그려진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렸기에 두 뺨이 빨갛게 얼어붙은 아이는 춥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옆에 있던 여인의 소매를 조용히 잡아당기고는 말했다.
 
 
 
"어머니, 올해는 선인들께서 안 오실지도 모르니 같이 집으로 돌아가요. 여기 정말 너무 추워요."
 
 
 
아이들은 못하는 말이 없구나!
 
눈을 아래로 굴린 불안한 기색의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허튼소리 말거라, 선인들께서는 반드시 오실 거야."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해서 사방에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이와 같은 의심과 불안은 이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이 대대손손 이곳에 거주하면서 매년마다 선인들이 왔는데, 올해는 왜 안 오는 걸까? 설마 마을 사람들을 더 이상 비호하지 않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산맥의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구름 속으로 높이 솟은 만장산(萬丈山) 봉우리였다.
 
왜지? 선인들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걸까?










산으로 둘러싸인 곳, 마치 하늘 끝까지 곧게 솟아오른 하얀 눈 색깔의 신검(神劍) 같은 영운봉(靈韻峰)은 녹령산맥 천체를 둘로 나눈다.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산 중턱부터는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이 녹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은색 나무와 얼음으로 된 꽃, 그리고 선령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유리 처마가 보이는 듯했다.
 
영선계(靈仙界)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선문(仙門)인 운간궐은 영운봉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산허리에 있는 폭넓게 탁 트인 빈터에 우뚝 솟아오른 통천옥주(通天玉柱) 아홉 개가 흰 옥처럼 돋보였으며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것이 위엄 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 세속을 벗어난 선경 같은 곳이, 강렬한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옥처럼 새하얀 땅이 얼룩덜룩한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는 데다가 산산조간 난 채로 무너진 담과 부서진 검이 매우 혹독한 전투가 한바탕 거쳐갔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수십 장(丈)이나 높게 솟아오른 선문의 비석 위에는 선혈이 흩뿌려져서 어둡고도 붉은 점이 곳곳에 얼룩덜룩하게 굳어 있었다⋯⋯.
 
셀 수 없이 빽빽하게 모인 마수(魔修)들이 영운봉을 완전히 물샐틈없이 에워싼 것이다.
 
마수들은 용모가 각양각색으로 기괴했고 분장이 제각각 이상했다. 어떤 이는 해골 같은 형상에 귀기(鬼氣)가 음산했고, 어떤 이는 검은 도포를 입은 채로 두 눈에 붉은빛이 돌았고, 어떤 이는 옷차림이 화려하고 용모가 요염했으며, 어떤 이는 가슴과 등을 드러낸 채로 살벌한 기세를 띄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등 무수히 많은 이들이 떠들썩하게 낄낄거리고 웃는 소리가 함께 잡다하게 섞인 것이 마치 색채가 기괴한 마귀 무리의 성대한 연회 같았다.
 
다만 수천수만의 마귀 무리와 피에 젖은 선문도 이것에 비하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못 되었다.
 
한 괴이하고 음산한 흑색의 탑이 마귀 무리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다. 탑은 구십구 층 정도로 높은 데다가 검은색을 띠었고 송곳처럼 끝이 뾰족한 형태였으며, 재질은 마치 매우 단단한 금석(金石) 같아, 표면에 살을 에듯이 차가운 빛을 띠고 있었다. 밖을 향해 펼쳐진 처마의 뾰족한 부분 하나하나가 모두 흉악한 악귀처럼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우며 마치 사람을 골라 씹어 삼키려는 것 같았다.
 
설사 가장 흉악하고 잔인한 마수라 할지라도 무의식 중에 검은 탑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탑에서부터 수십 장 안으로는 어떤 마수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으며, 모두들 조심스럽게 피하는 데다 감히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치 그 안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때문에 검은 탑이 있는 곳은 조그마한 먼지도 하나 없었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땅이 되었다.

챙그랑.
 
방려는 손가락을 미미하게 구부렸는데, 손끝에는 매우 차디찬 촉감이 남아 있었다. 마치 잠에서 덜 깬 그가 무심코 무언가를 엎지른 것 같았다.

곧 어리둥절해진 그가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자, 두꺼운 회색 융단이 깔린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비취가 박혀 있고 순금으로 조각된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서 투명한 술이 융단에 느릿느릿하게 스며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의 손은 작은 침대[각주:4]의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다리가 짧고 면적이 넓은 검은 나무 탁자가 있었다. 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바로 자신이 방금 탁자 위에 있던 술잔을 엎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사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기에, 방려는 한순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눈동자를 아래로 향한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건 한 쌍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이다. 살집 없는 손가락은 뼈마디가 불거져 나왔고, 손톱은 조금 긴 것이 아주 오랫동안 다듬지 않은 것 같았으며, 손톱 뿌리 부분은 진한 잿빛이 감돌았다. 손이 아주 보기 좋기는 하다만 병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건 그의 손이 아니다.
 
방려는 눈을 내리깔았다.
 
대략 열 번 정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을 때였을까, 머릿속에서 갑자기 말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깨어나셨군요.】
 
 
 
멈칫한 방려는 떠보듯이 입을 열었다.
 
 
 
"시스템?"
 
【자기 소개를 준비하고 있었던 시스템: ⋯⋯.】
 
 
 
방려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나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시스템: 어리둥절한 기색이 조금도 없으신 것 같네요.】
 
 
 
방려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한번 시도해 본 건데, 정말 있었구나. 나는 사실 정말 어리둥절해."
 
【시스템: ⋯⋯.】
 
 
 
그런 기색은 느끼지 못했는데.
 
시험 삼아 경직되어 있는 생소한 몸을 편 방려는 천천히 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이 얼음같이 차가운 흑색의 방 안에 시선을 주었다.
 
원래는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 생소한 곳에 나타나 생소한 몸을 가졌다. 만약 서 있는 곳이 일종의 환각이 아니라면⋯⋯ 요즘 흔히 사용하는 표현에 따르면, 그는 바로 이세계 빙의를 한 것이다.
 
비록 그는 소설에 빠진 인터넷 중독 소년이 전혀 아니었지만, 각종 인터넷 소설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여동생이 있었기에 자주 보이는 설정도 조금 알고 있었다. 듣건대 주인공은 항상 시스템과 같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대로 진상을 속여 넘길 수 있다고 했다. 정말 시스템이 있다면 자신의 아주 많은 일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본래부터 그는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며 만족하는 데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시스템은 이미 귀를 기울여 듣는 모습을 드러낸 숙주[각주:5]를 보고 잠시 침묵하더니, 자기가 잘 준비했던 현재의 상황 설명을 삼켜내고는 아주 성실하게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이 세상은 한 소설이 변화하여 나타난 세계입니다. 중요한 등장인물 하나가 예기치 않게 사망했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이 배역을 계속 이어나가서 반드시 줄거리에 따라 주요 스토리를 끝내야 합니다. 소설의 이야기를 끝내야 세계가 스스로 움직이고 돌아간 끝에 완결될 수 있습니다.】
 
 
 
방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 빙의한 거였군.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관심 없어."
 
【온기 없는 목소리의 시스템: ⋯⋯ 거절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당신은 이미 죽었으니 거절한다면 사망한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
 
 
 
방려는 가볍게 웃었다.
 
 
 
"너 설마 내가 자살했다는 걸 모르는 거야?"
 
【시스템: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말문이 막힌 시스템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하자."
 
 
 
잠시 말을 멈춘 방려가 이해심 있게 말했다.
 
 
 
"네가 나에게 여기가 어떤 세계인지 알려준다면, 이 임무를 맡을지 말지 다시 생각해 볼게."
 
 
 
아직 숙주를 어떻게 설득할지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시스템은 숙주의 어세가 부드러운 것을 보고, 부랴부랴 이야기를 숙주에게 주입했다. 숙주가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방려가 눈을 깜빡일 동안, 마치 직접 봤었던 것처럼 이야기의 일부분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시 후, 그는 침묵 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한 가닥 비친 표정을 드러냈다.
 
이런 천벌 받을 막장 잭 수[각주:6] 똥무더기[각주:7] 글은 정말 처음 봤다.
 
이 세계는 영선계라고 불리었고, 주인수는 이름이 사회(谢怀)였다.
 
이 세계의 유일한 주인공인 데다가 천명을 타고난 사회는 누구나 매혹될 만한 사람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작중에서 정파든 사파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그를 사랑했지만, 무릇 명성이 높고 매력이 있는 캐릭터들은 사회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사회를 좋아하게 될 과정에 있었다.
 
이 소설의 가장 세력이 큰 악역인 마존 염수(厌睢)도 당연히 피해 갈 수 없었다. 사회를 강탈하여 돌아온 그는 처음엔 전혀 진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십만 자로 묘사된 맹목적이고도 끈질긴 사랑을 한 뒤에는, 먼저 관계를 하고 나서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듯이 끝내는 매우 흠잡을 데 없이 굴복하지 않는 사회에게 탄복되어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말이라면 모든지 따르는 데다 마음대로 취하게 두어, 심장을 파내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사회는 마음이 냉담하고 냉정하여,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그 마음속에는 오직 제마위도[각주:8] 뿐이었다⋯⋯. 무수한 시달림을 겪은 끝에, 직접 마존을 제 손으로 베어 죽였고 마화[각주:9]를 안정시켜 마침내 영성계제일인이 되었다.
 
그를 경모하는 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우르르 달려들었지만, 소설이 완결될 때까지 사회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몸을 취한 마존은 심장을 그에게 검으로 관통당했다.
 
사회가 이성애자 남자라고 추측한 방려는 다시 줄거리를 보았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는 사회의 몸에 각종 아름다운 어휘와 미사여구를 아끼지 않았다. 차갑고 범하기 어려운 고결함, 절세, 도도함, 굳건함⋯⋯. 그의 마음은 정의를 바로잡고, 심지가 견고하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길에 향해 있었다. 현재 영선계에서 제일가는 하늘의 총아인 그는 본래 한평생이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렇게 완전무결한 존재가 마존에게 사로잡혀 각양각색으로 시달렸으니, 이유 없이 그의 강직한 성격이 부러뜨려진 채로 세속의 더러운 진창에 떨어져야만 했다.
 
이 소설은 몇십만 자를 거침없이 척척 써 내려갔긴 했으나 유용한 줄거리는 별로 많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마존과 사회의 온갖 수단이 다 나오는 배드신이었고, 하늘의 총아를 강제로 어떻게 학대할지가 쓰인 내용은 색정적이고도 자극적인 데다가 생동감이 넘쳐서 무릇 사람이라면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방려가 소설을 충분히 많이 읽었더라면, 논리 없는 R-18 소설 안에서는 정말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마존은 바로 고대 수선계판의 패도총재[각주:10]였지만, 강요당하는 사회는 예사로운 주역이 아니었다.
 
그는 가해지는 고통을 직면했음에도 울지 않고 애원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애정 어린 마음을 직면해도 웃지 않을뿐더러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속으로 굳게 지키는 것은 제마위도였다.
 
그의 도심[각주:11]은 대단히 견고하여 꺾을 수 없었다.
 
어떠한 사람이던 어떠한 일이건, 그를 추호도 동요시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최후엔 사회가 손수 마존을 죽였다. 마존이 죽자마자 부구산(浮丘山)에는 주인이 없어졌고 만선맹의 공격 아래 나머지 마수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막대한 죽임과 부상을 입어, 도망칠 이들은 도망치고 항복할 이들은 항복했다. 영선계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이 결말은 사람들이 보기에 마음이 편해지는 셈이었다.
 
해피 엔딩을 위해 사회가 마존에게 헌신하게 되는 전개를 강행하지 않았다.
 
어쩌면 작가는 아름다운 물건을 깨부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종의 특수 취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사회의 품성이 여태까지 무너진 적이 없으며, 마존을 사랑할 수 없는 사회여야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냉담하고 냉정한 데다 심지가 견고하니, 지금껏 사랑에 탐닉되지 않은 채로 도를 닦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런 괴롭힘 아래에서도 추호도 굴복하지 않은 채로 본래 가졌던 마음을 지켜냈으니 방려의 마음속에는 경탄이 감돌았다.
 
어찌 되었던 이 이야기는 읽기만 하면 그만이지, 직접 등장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그는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엄청난 악역이었다. 사회를 온갖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괴롭히고 강요했던 마존은 죽어서 시체도 온전히 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뼈가 잿가루로 흩날려지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런 역할은 정말 그 어떤 매력적 요소도 보이지 않았다.
 
방려는 차분하게 말했다.
 
 
 
"다 봤긴 했는데, 너희들은 그냥 더 적당한 사람을 찾는 게 낫겠다."
 
 
 
시스템은 이미 방려가 승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했다. 이번에 잘 준비한 구실은 마침내 유용하게 쓰였다.
 
 
 
【시스템: 당신이 순조롭게 임무를 완수하고 이야기를 끝내기만 하면, 제가 당신을 도와 이 세계에서 신체 하나를 새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눈을 들어 보이고 웃은 방려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모습으로 유유히 말했다.
 
 
 
"너 오해했구나, 난 단지 연기를 하지 못할 뿐이야."
 
【시스템: ⋯⋯.】
 
【아주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어렵사리 타협한 시스템: ⋯⋯ 반드시 이야기를 완전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충 많이 벗어나지만 않은 채로 결말까지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책 속 이야기의 결말까지 버티기만 하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데다가 엄청나게 많은 연기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서, 정말 수지맞는 장사인데⋯⋯.】
 
 
 
방려는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정말 살고 싶은 것처럼 보여?"
 
 
 
시스템은 말을 멈추었다. 이렇게나 상대하기 어려운 숙주를 맞닥뜨린 적은 아주 드물었다. 보통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허락해 준다면 대부분의 숙주는 동의했었다. 이런 특별 대우까지 준다고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숙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려는 의욕이 조금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시스템은 숙주를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숙주는 그가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쨌든 간에 때마침 사망한 데다가 영혼이 배역과 부합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조금 자포자기한 시스템: 하지만 당신이 이 임무를 하지 않는다면, 뒷이야기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방려는 미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러는 편이 낫지 않나?"
 
 
 
이런 이야기는 소설로 보면 그만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발생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
 
 
 
【넋 나간 목소리의 시스템: 그렇지만 지금 이야기는 막 시작한 참이고, 이 세계는 방금 변화되어서 토대가 튼튼하지 않습니다. 만약 뒷이야기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무질서한 혼란에 빠질 것이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할 방법이 없어서 이 세계는 아주 빠르게 붕괴할 겁니다. 모든 것이 또다시 허무로 돌아갈 겁니다⋯⋯.】
 
 
 
동작을 순간 멈칫한 방려는 미미하게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만, 완전히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시스템: ⋯⋯?】
 
 
 
방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는 없어."
 
 
 
만약 처음에 방려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시스템은 분명히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로 한바탕 잘 풀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막다른 곳에서 위기를 모면한 시스템은 예상치 못한 일에 기뻐 어쩔 줄 몰라했기에, 이미 방려와 조건을 이야기할 엄두가 다시는 나지 않는 상태였고, 그가 기분이 나쁘면 짐을 버려둔 채로 그만둘까 봐 걱정이 되었다.
 
 
 
【시스템: 네, 네, 좋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해, 기껏해야 다 같이 파멸할 뿐이니까!
 
어, 시스템은 생사를 마음에 두지 않기만 한다면 번뇌가 홀연히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빨리 방려에게 감화되다니⋯⋯. 다만 한 가지, 시스템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시스템: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겁니까?】
 
 
 
방려는 조금 낮은 곳에 있는 순금 술주전자를 잡아서 가볍게 몸체를 어루만졌다. 주전자 겉면의 조각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잡아 보자 묵직한 느낌이 들었고 손바닥으로 서늘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두텁고 부드러운 융단 위를 밟은 그가 정신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니, 어렴풋하지만 밖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실재하는 세계가 이렇게 사라진다니 좀 아쉬웠다.
 
 
 
"갑자기 한번 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어쨌든 내가 손해 보는 쪽도 아니잖아⋯⋯."
 
 
 
방려가 미미하게 웃었다.
 
 
 
【조금 의심스러워하는 시스템: 정말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설마⋯⋯."
 
 
 
눈썹을 치켜올린 방려가 어조를 길게 늘이며 말했다.
 
 
 
"너 정말 내가 사는 게 지겨워서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시스템: ⋯⋯.】
 
 
 
네가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시스템은 숙주의 의미 없는 담담한 모습을 보았다⋯⋯. 그는 오히려 숙주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불현듯이 내킨 거라고 믿고 있었다. 결국 숙주도 말했듯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보증하지 않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숙주가 시도해 보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시작이다! 시스템은 조금 감동적이었다.
 
방려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난 염수의 기억이 필요해."
 
 
 
시스템은 순간 주저했다.
 
 
 
【시스템: 당신은 이미 원작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고,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천제(天帝)의 시점입니다! 아직도 상대방의 기억이 필요합니까?】
 
"설마 내가 기억도 없는 채로 이런 배역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방려가 이어 말했다.
 
 
 
"그랬던 거라면, 넌 정말 나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거야."
 
【분주한 시스템: 당신이 필요하다고 확실히 결정을 내리면, 기억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시스템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정신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이 원래 주인의 기억을 받아들이면 아마도 자신의 기억에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데다가 심지어 인지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을 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숙주가 간신히 승낙했기에, 어떤 변고도 원하지 않았던 시스템은 제 발이 저린 채로 이 위험 안내를 감추었다.
 
방려가 말했다.
 
 
 
"결정했어."
 
【시스템: 알겠습니다.】
 
 
 
시스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려는 머릿속에서 심한 고통을 한 차례 느꼈다. 곧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변했고 그의 시선은 공허해졌다⋯⋯. 한참 후에야 두 눈동자가 비로소 다시 초점을 되찾았다. 모든 것은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았지만, 머릿속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늘어났다.
 
이 기억은 머리에 물밀듯이 그에게 주입된 것은 전혀 아니었고, 마치 데이터 같은 종류처럼 그의 대뇌 속에 축적되었다⋯⋯. 그가 내킨다면 자신의 기억과 같은 방식으로 필요한 기억을 찾아서 읽을 수 있었다.
 
아주 편리했고, 게다가⋯⋯ 그가 예상한 상황보다 훨씬 더 나았다.
 
마존 염수는 신비롭고 막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과거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 년 전에 마성(魔星)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세상에 나타난 그가 휘젓고 다닌 영선계는 온통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었고 비 오듯이 피가 튀겼다⋯⋯. 이런 냉혈한 심성(心性)을 지닌 악역의 기억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충분히 침략적일 것이다.
 
염수가 몇 백 년을 산 늙은 요괴라고 해 보자. 그의 기억에 비해 자신의 기억은 마치 큰 바다에 던져진 한 알의 좁쌀 같을 것이며, 심지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파묻혀버리게 되어 자신을 잃어버리고 방려의 기억을 가진 마존이 될 수도 있었다.
 
이건 방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시스템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생각이 바뀔 것을 걱정해 일부러 숨기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도 방려의 결정을 전혀 바꿀 수 없었다. 그가 기왕 한 가지 일을 맡게 된 이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떠한 일이라도 위험과 좋은 기회가 동시에 존재한다⋯⋯. 원작은 오직 염수와 사회의 베드신 스타일에만 집중했으나, 한두 마디밖에 적혀 있지 않은 단편적인 말을 보면 여기는 대단히 위험하고 개개인의 무위가 높은 세계[각주:12]임을 알 수 있었다. 마존 염수의 기억이 없으면 그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걷는 것도, 살아서 이 문을 걸어 나오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만사(萬事)를 매우 신중히 생각해서 처리한다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마음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임무를 포기해도 되었다.
 
다행인 것은 염수의 기억이 긴 편은 아니었다. 이십여 년만 있는 것이 방려의 나이와 별로 차이가 없었다. 머리에 물밀듯이 주입된 것은 전혀 아니었고 머릿속에 보존되어 마음대로 취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그가 기억을 사용할 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염수의 과거 속에 빠져들지 않을뿐더러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완전히 제어 가능한 범위에 속했다.
 
 
 
【떠보듯이 입을 연 시스템: 숙주?】
 
 
 
방려는 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숙주를 한번 자세히 관찰한 시스템은 좀 전과 다른 어떠한 변화도 없으며 입마(入魔)한 흔적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순간 마음이 놓였고, 마음속으로 느낀 양심의 가책도 조금 덜해졌다. 보아하니 이 기억은 숙주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너무 많이 걱정한 것이다.
 
 
 
【일깨워주는 시스템: 나가서 사회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억과 줄거리를 합쳐보던 방려는 작게 읊조리더니 아주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이 전쟁에서 운간궐은 목숨을 내던지고 싸웠지만, 차츰 패배하여 퇴각하더니 더 많은 사상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호종대진[각주:13]을 열었고 종문의 제자를 전부 진 속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군마(群魔)를 호령하여 운간궐을 겹겹이 포위한 마존 염수는 만약 옥의군 사회를 기꺼이 넘겨준다면, 그를 연총[각주:14]으로 삼아 운간궐에 살길을 열어줘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나날들 속에서 마수들은 조를 나누어 교대로 돌아가면서 호종대진을 쉬지 않고 공격했다. 줄거리에 따르면 사회는 운간궐에서 포위된 지 꼬박 칠칠사십구일[각주:15]이 되어 곧 버티지 못할 때 나타날 것이다.
 
오늘이 바로 마흔아홉 번째 날이었다.
 
사실 운간궐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영선계의 오대선문의 수장으로 만 년이나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 왔기에 운간궐의 실력은 아주 강했다. 다만 아무리 강해도 결국엔 문파 하나일 뿐, 아무래도 수백 개의 마문(魔門)과 천만 명의 마수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혼자서는 큰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선문(仙門)도 이런 식으로 연대해서 같이 군마에 대항할 수 있었더라면 어찌 이런 지경까지 몰락했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이리 적음을 안타까울 뿐이다.
 
사십구일 내내 지원하러 온 종문 하나 없이, 운간궐은 홀로 멸문당할 위험에 맞닥뜨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인간의 본성은 박정하다. 단지 그 정도뿐인 것이다.
 
아주 가볍게 조소하는 소리를 낸 방려는 침상에서 일어나 어두운 무늬의 검은 비단 장포를 땅에 늘어뜨렸다.
 
시스템은 방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바로 방려와 주인수 사회가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다.
 
바로 이때, 방려가 손을 내밀더니 바닥에 떨어진 술잔이 손 안으로 날아 들어왔고, 방려는 다시 유유히 앉았다.
 
 
 
【시스템: ???】
 
 
 
숙주가 사회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사회가 만약 나왔더라면 당연히 수하가 보고하러 오겠지. 본존(本尊)이 직접 나가서 기다려야 한다는 규칙이 어디에 있나."
 
 
 
나른한 기색의 방려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게다가, 본존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사회를 가져서 연총으로 삼아야 한다고 떠벌리긴 했지만, 사회가 오던 안 오던 그건 원래 중요하지 않았다.
 
염수가 마군을 호령하여 운간궐을 호령한 목적은 사회가 아니라, 정도를 걷는 선문을 모욕하는 데에 있었다. 운간궐의 실력은 강대하고 역사가 유구한 데다가 영선계에서 매우 위엄과 명망이 있었고, 본보기로 목을 베기에 적합했다⋯⋯. 만약 운간궐이 어쩔 수 없이 사회를 넘겨준다면 더더욱 많은 선문들의 면상에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지금 이곳의 모든 것은 일찍이 관심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머리를 움츠린 거북이 같은 선문의 표정을 상상해 보는 것도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염수가 이번 일전에서 사회를 사로잡은 것은 단지 물의 흐름에 따라 배를 민 것일 뿐이다. 원래 주인도 하나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이라 방려도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시스템은 조금 정신이 아득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 아닌가? 더 중요한 일이 더 있다고? 왜 시스템은 모르는 걸까?
 
바로 그때, 입구의 흑색 휘장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방려가 손을 한번 흔들자마자 문이 바로 열렸다.
 
한 남자가 하인의 인솔 아래 예의 바르게 다가왔다.
 
검은 장발을 뒤통수에 묶은 남자는 용모가 부드럽고 섬세하고도 준수했고, 동공이 세로로 길쭉한 한 쌍의 암홍색 눈동자에 괴이한 빛이 감돌았다. 짙은 자색 장포를 입고 허리에 흑색 비늘로 된 긴 채찍을 휘감은 그는 공손하게 몸을 굽혀 예를 올리면서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존상, 오늘로 벌써 칠칠사십구일이 되었습니다. 운간궐의 호종대진이 곧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총공격을 개시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바로 마존 염수가 가장 신임하는 왼팔과 오른 어깨로, 좌사(左使) 오의잠(乌衣寐)이었다. 또한 원문에서 각종 방법으로 사회를 괴롭히고 모함하는 악독한 총알받이기도 했다. 사회의 처지가 그렇게나 참담했던 것에는 오의잠의 불난 집의 부채질을 빼놓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음험하고 교활하며 잔인한 마두(魔頭)로, 염수 곁에서 제일 유능한 앞잡이이기도 했다⋯⋯.
 
한 편의 막장 고구마[각주:16] 소설이 이야기를 진전시키려면 당연히 오의잠같은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방려는 이해한다는 기색이었다.
 
다만 그의 결말을 생각해 보건대, 만약 다른 배역과 똑같이 사회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악독한 총알받이가 되는 데에 전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담담히 시선을 거둬들인 방려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눈을 내리깔면서 술 한 잔을 따랐다. 잔 속에 있는 술은 맑고 투명하게 반짝였으며 술 향기는 널리 퍼졌다⋯⋯. 오의잠의 말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은 그는 구석에 머리를 숙인 채로 서 있던 시종을 바라보더니 미미하게 웃었다.
 
 
 
"너도 본존의 시중을 든 시간이 짧지 않은 데다가 줄곧 본존의 신임을 많이 받아 왔으니, 이 술 한 잔을 너에게 상으로 주마."
 
 
 
그 검은 옷의 하인은 갑자기 눈을 치켜떴는데, 두 쌍의 운동자에 기이하고 음침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칠규[각주:17]에서 피를 흘리며 꼿꼿이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숨이 끊어졌다!
 
순간 멍해진 오의잠은 곧 아주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그 시종의 시체를 훑어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히 존상께 독을 넣은 겁니까?! 존상께서는 어째서 산 증인을 남기지 않으셨습니까, 속하가 고문하여 배후의 주모자를 색출할 수 있습니다!"
 
 
 
연혼탑(炼魂塔)은 마존의 법기(法器)이고, 탑 안은 모두 마존의 영역이다. 만약 존상께서 원치 않으셨으면, 이 자는 죄를 두려워하여 자살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혼백을 뽑는 고문을 하여 배후의 인물을 색출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존상께서는 눈을 뻔히 뜨고 이 자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가볍게 술잔을 내려놓은 방려가 오의잠에게 웃어 보였다.
 
 
 
"무방하다. 본존은 속셈이 있다."
 
 
 
그는 혼백을 뽑아서 괴롭히는 취미가 없었고, 사람을 죽여서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스스로 끝을 내기를 원하는 것은 더없이 좋았다. 다양한 악행을 저지르고 주인을 배반하여 영예를 누리려는 마수는 죽어도 속죄할 수 없는 데다가 또 방려는 이런 종류의 사람까지 동정하지 않았으니, 이 자를 시원시원하게 죽인 것만으로도 이미 관대하게 봐준 거였다.
 
그러지 않고 오의잠이 처벌하게 둔다면, 그제야 이 자는 무엇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고 부르는지, 또 죽음도 일종의 사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염수는 이 자의 손 안에서 죽은 것이니, 한 목숨으로 한 생명을 취한 것은 공평한 것에 불과했다.
 
 
 
【결국 놀란 시스템: 도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방려: 오의잠이 방금 한 말을 못 들은 거야?】
 
【시스템: ⋯⋯.】
 
 
 
이렇게 사람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방금 너무 놀란 시스템은 잠시 너무 당황해서 이곳에 아직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까먹고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영민한 숙주가 머릿속으로 대답하는 것을 알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시스템: 듣긴 했는데, 너무 뜻밖입니다⋯⋯.】
 
【방려: 난 더 뜻밖인데. 설마 염수가 어떻게 죽은 건지 생각해 본 적 없어?】
 
【시스템: ⋯⋯.】
 
【느릿하게 말하는 방려: 살아 있어야,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어.】
 
 
 
방려의 손가락이 가볍게 탁상 위를 두드렸다. 배후의 주모자가 누구일까. 글 전체를 본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거의 속셈을 세워 놓았다. 산 증인을 남겨 놓을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면 그도 산 증인을 남겨둘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건 뜻밖이었다.
 
혼을 분리(离魂)하는 이 독은 천하의 기독[각주:18]이었으나, 원래 염수의 목숨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염수는 때마침 수련을 할 때 심마(心魔)가 틈을 탔고, 주화입마에 빠져 이혼(离魂)독에 죽었다. 염수의 죽음은 확률이 극히 낮은 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원작에서도 원래 쓰여 있지 않았고 원래는 발생하지 않아야 할 사건이었다⋯⋯. 아니면 원작에서도 발생했지만, 염수가 죽지 않았기에 대충 묘사해서 처리한 걸까?
 
오직 쿵떡쿵떡에만 집중한 채 머리에 정신줄을 놓고 쓴 R-18 소설이 완전한 세계로 변화한 뒤로, 본래의 이야기는 오히려 수면에 올라온 빙산의 일각이 되고 말았다.
 
정보의 양이 매우 제한적이었기에 한동안 방려는 도대체 원인이 뭔지 깊이 파해칠 방법이 없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일은 깊이 파해칠 수 없었다. 첫 번째로 배후자는 중요한 역할이라 제대로 잘 남겨두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에 써먹어야 했고, 두 번째로 이 마문에서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세려야 셀 수 없었고 개개인이 모두 속셈을 품고 있었다. 만약 지나치게 진지하게 군다면 쓸 만한 수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로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간주할 수는 없었고,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끝을 맺었다.
 
자신은 방금 주화입마를 겪었다. 한 번 죽고 살아났기에 극히 허약할 때였고 우스운 꼴을 한 치도 보여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반드시 기회를 틈타 살을 먹고 뼈를 삼켜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계략을 써서 이 자를 자결하도록 강제하고, 나아가 공격을 물리고 수비하도록 했다. 잠깐 동안은 배후의 인물과 반목할 필요가 없었고, 또한 암암리에 상대방을 자극해서 다소 두렵게 할 수 있었다. 대체 자신이 폭로되긴 한 건지, 때를 기다렸다가 결판을 볼 수는 있는 건지 말이다⋯⋯. 최소한 당분간은 감히 자신에게 반항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오의잠은 묵묵히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문의 준칙은 바로 약육강식이다. 군마는 비록 마존의 위엄에 감히 저항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준다면 모두들 마존을 죽이고 그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할 것이다⋯⋯.
 
존상께서 자신의 앞에서 이리 하시는 것은, 설마 살계경후[각주:19]를 위해서인가?
 
눈빛이 가라앉은 오의잠은 무릎 하나를 꿇고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속하는 절대 존상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방려는 오의잠의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았다. 줄거리 전체를 본 그는 이에 깊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의잠이 생각을 많이 했다고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으며 감개의 미소를 가볍게 지었다.
 
 
 
"본존은 믿는다."
 
 
 
왜냐하면 최후의 그 순간까지도 부구산에 남아 그와 함께 죽을 이는 오직 이 악독한 총알받이 뿐이기 때문이었다.

  1. 魔修, 마도(魔道) 수련자. [본문으로]
  2. 谪仙, 벌을 받아 세속에 내려온 신선 [본문으로]
  3. 魔頭,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 [본문으로]
  4. 원문은 软塌(ruǎntā, 보통 나른하고 무력해진다는 软塌塌의 형태로 사용됨)으로, 软榻(ruǎntà, 푹신하게 걸터 누울 수 있는 길쭉하고 낮은 침대)의 오타로 보인다. [본문으로]
  5. 빙의자를 뜻하는 말이다. 편의상 원문 한자를 직역한 숙주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6. 원문은 杰克苏(Jack Sue)이다. 스타트렉 펜덤에서 유래한 용어인 '메리 수'를 남성 주인공으로 바꿔 부르는 것인데, 잭 수라는 이름은 중국 내에서만 사용된다. 메리 수는 작가가 2차 창작에서 자기만족을 위해 작품에 넣은,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를 뜻한다. 때문에 작가가 해당 캐릭터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고 편애하여 2차 창작에서 거의 '메리 수'의 비중과 활약이 지나치게 높게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으로]
  7. 원문은 변소라는 뜻의 厕所인데, 똥무더기라고 의역했다.(그냥 이런 뜻으로 쓴 것 같아서..) [본문으로]
  8. 除魔卫道, 마(魔)를 제거하고 도(道)를 지킨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마는 악하고 나쁜 것을, 도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옳은 것을 뜻한다. [본문으로]
  9. 魔祸, 마(魔)로 인한 재앙. [본문으로]
  10. 霸道总裁,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의 재벌가 도련님. [본문으로]
  11. 道心, 도에서 우러나오는 마음. [본문으로]
  12. 원문은 高武世界로, 개인의 힘을 중시하는 세계를 뜻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약자는 무시당하고 힘이 제일 우선순위인, 인의예지가 없는 세계관을 생각하면 된다. [본문으로]
  13. 원문은 护宗大阵으로, 종문을 보호하는 커다란 진법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14. 娈宠, 홍루몽에 등장하는 가련(贾琏)처럼 응석받이로 자란 부잣집 자제의 떳떳지 못한 남성 연인, 남성 첩을 뜻한다. 참고한 자료 출처: https://zhidao.baidu.com/question/15705790.html?fr=search&word=%E5%A8%88%E5%AE%A0 [본문으로]
  15. 七七四十九日, 옛날에 사람이 죽고 나서 제사를 지내던 기간인 49일을 뜻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에서는 칠칠재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원문은 虐文으로, 학대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소설 내에서 주인공에게 비참한 상황이 생기거나, 소설이 구멍투성이어서 독자가 괴로워하는 글을 뜻한다. [본문으로]
  17. 눈과 귀, 코, 입을 합한 일곱 개의 구멍을 뜻한다 [본문으로]
  18. 奇毒, 기이한 독. [본문으로]
  19. 杀鸡儆猴, 닭을 죽이고 원숭이를 경계하게 하다. 주로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하여 처벌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