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렇게나 배운 것도 능력도 없는데, 교만한 데다가 방탕한 사람 같습니까
석양빛의 잔광마저 높고 험준하게 깎아지른 산봉우리에 삼켜져, 밤의 어두움이 세상을 가득 뒤덮었다. 밝은 달은 광채를 쏟아내었고, 그렇게 한쪽으로 비친 장안 교외의 죽림(竹林)은 쏴쏴 소리를 냈다. 대나무 그림자가 어슴푸레 비치는, 그윽하고도 기이한 곳에서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바람 속에서 부서졌다.
"소 대인. 갑자기 느끼는 건데, 당신이 도박장을 조사하러 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정황을 보아하니, 어떻게 봐도 밤에 밀회하러 가는 것 같습니다. 괜찮으니 진솔하게 터놓으십시오, 혹시 이미 마음이 움직여서 저에게 무슨 짓을 할 속셈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 제가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옷섶을 모으고는 박달나무로 조각된 부채를 손에 든 초명윤이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으로 소세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죠, 같이 제대로 상의해 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이 몸에 입힌 옷을 어떻게 더 빨리 벗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저에게 알려줘도 돼요, 당신이 좋아하는⋯⋯."
"초 대인."
소세예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걷고 있던 초명윤은 거리가 가까워지기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세예가 그를 바라보았다. 초명윤은 조금 어리둥절해진 채로 응답했다.
"음?"
"소모는 마지막으로 당신과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게 언제였는지 이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고개를 돌린 소세예는 다시 탐색하면서 앞으로 몇 보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발아래에 단단한 물건이 밟히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굽힌 그가 손에 있는 화절자의 빛으로 푸른 대나무의 뿌리 부분을 꼼꼼하게 관찰하더니 여태까지 흙에 묻혀진 적 없었던 대나무의 뿌리 속으로 손을 펼쳐 가는 쇠고리를 당겨 냈다. 갈라지는 마찰음이 한바탕 울려 퍼졌고, 이에 겉에 덮여 있던 흙이 위로 솟구쳐 오르다가 곧 사방에 떨어져 흙먼지가 가득 피어올랐다.
입과 코를 막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초명윤은 그 열린 지면이 온통 흙투성이가 된 것을 보았다. 원래 철판 아래쪽에는 좁게 난 통로에 있는 돌계단이 감춰져 있었다. 이 길은 극도로 비좁았고 빛이 없어 매우 어두운 데다가, 음침하고 으스스하게 아래를 향해 뚫려 있었기에 마치 저승길을 가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도박장의 입구입니까?"
초명윤이 싫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귀신 나올 것 같은 곳으로 들어가고도 흥을 내어 노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위가 높고 귀한 몇몇 사람은 당연히 다른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는 겨우 노름꾼 몇 명만 포섭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초 대인을 불편하게 했군요."
소세예가 말을 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경조부윤이 머뭇거리면서 이 도박장을 압류하지 못했던 겁니다. 만에 하나 관료들이 이곳을 통해 들어가지 못한다면 저쪽은 이미 깔끔하게 도망친 상태가 될 테니까요."
초명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소세예는 화접자를 끄고 막 들어가려고 할 때,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났다.
"이 길은 아주 어두울 것인데, 초 대인께서 생각하기에 불편할 것이 있으십니까?"
"불편하다면 무엇을 하실 겁니까, 설마 저를 끌고 가 주시겠다는 겁니까?"
초명윤은 본래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한 거였지만, 의외로 소세예는 정말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달빛이 내리쬐어 대나무 그림자가 어지러이 비치는 풍경 속에서, 소세예는 뒤돌아보며 그에게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가 볼까요."
그는 결국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구로 발을 들인 그들은 천천히 돌계단을 따라 걸어갔다. 과연 이 길은 한 오라기 빛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농밀한 어둠이 시야에 온통 자리 잡았다. 그들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주위는 더욱 음산해졌고 피부에 달라붙은 한기는 마치 살결에 배어들 것 같았다. 초명윤은 온몸에서 오직 손목만에 아직 조그마한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옷소매 너머로 엷게 다가오는, 사람 손안에 있는 따스함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오직 발걸음 소리만이 돌계단 위를 디뎠다.
대체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으나 돌계단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고, 머지않은 길에 빛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십 보를 더 가니 눈앞이 탁 트였다.
이곳은 마치 골짜기에 있는 곳 같았다. 눈앞에 높이 솟아올라 있는 누각은 기둥과 대들보에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었고, 겹겹이 있는 등불이 마치 대낮인 것처럼 환히 빛났다.
주홍빛 문 앞에 있는 하인은 모두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초명윤과 소세예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종종걸음으로 환영하러 다가온 누군가가 극진하게 흰빛 가면 두 개를 넘겨주었다.
"아이고, 두 나리께서 영락방에 왕림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분께서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눈을 내리깐 초명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을 손에 들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걸 쓰고 뭘 하는 겁니까?"
"여기에 온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쓰면 뭘 하던 간에 문제가 되지 않으니, 더욱 자유로워지는 거죠."
하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마 아래로 내려오는 가면은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렸기에 아래턱만 노출되었다. 초명윤과 소세예는 서로 시선을 맞추고 나직하게 웃고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짙은 술 향기와 연지 향기가 한데 섞여 대청의 이곳저곳에 떠다녔다. 돈과 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고, 가희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고함치며 욕하는 소란과 뒤섞였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노름이 펼쳐지는 탁자란 탁자는 앞에 인파가 가득했고 그 속을 아리따운 기생이 누비고 있었다. 분위기는 한창 열렬한 참이었다.
"음?"
소세예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본 초명윤은 손을 뻗어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소세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를 밀어내지 않은 채로 목소리를 냈다.
"이 장소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으니, 도박장의 주인을 만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 대인께서는 이미 생각이 있으신 것처럼 보이는군요?"
"이곳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이유에는, 금기가 하나도 없는 데다가 안 하는 도박이 없는 것 외에도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소세예가 말을 이었다.
"그 노름꾼들은 여기에 규율이 있다고 했습니다. 판에서 가장 많이 돈을 딴 사람은 위층으로 가서 주인과 노름을 할 수 있는데, 거기서 이긴 승자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걸 저들이 반드시 이뤄준다고 하더군요."
"마음대로 제시한다?"
초명윤이 비꼬는 뜻이 없지 않아 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오만방자한 말은 지금의 성왕께서도 가볍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세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곳이 기괴하다고 느낀 겁니다, 단순히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초명윤을 향해 눈길을 옮겼다.
두 사람은 조금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이번에 두 쌍의 눈이 마주쳤을 때는 눈동자 안의 깊은 곳까지 보게 되었다. 초명윤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그는 조금 멍해진 채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뒤로 조금 물러나 조금 거리를 벌렸다.
초명윤은 그의 시선이 닿자, 소세예가 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깨닫고는 재차 물었다.
"노름할 줄 모르십니까?"
"이런 종류의 일은 당연히 정통하지 않습니다."
소세예가 웃었다.
"큰 것에 걸거나 작은 것에 거는 거라면 간신히 그런대로 해 볼 수는 있지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대범하게 거는 노름은 패구이니 더더욱 힘을 써볼 수가 없습니다." 1
초명윤이 웃었다.
"공교롭군요, 저도 노름을 할 줄 모릅니다."
고개를 돌린 소세예가 초명윤을 똑바로 보았는데, 가면으로 가려졌지만 그의 깊은 의아함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
초명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렇게나 배운 것도 능력도 없는데, 교만한 데다가 방탕한 사람 같습니까?" 2
소세예는 묵묵히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웃었다.
"그럴 리가요."
초명윤은 눈썹꼬리를 치켜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아무튼 저는 병역에 복무하는 사람입니다. 군대의 군기는 엄격하고 명확해야 하니 제 인품이 어떤지간에 이 방면에서는 언제나 몸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 실례했군요."
소세예가 말을 잠시 멈추고는, 보기 드물게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돌아가서 다시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의논해야 할까요?"
"뭘 갑니까, 이미 와 버렸는데."
초명윤은 대청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노름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사람들이 바글거렸으며 탁상 위에는 산돈이 쌓이고 쌓여서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노름판에 있는 인물은 모두 옷차림이 호화로웠고, 뒤쪽에는 시중드는 하인이 일렬로 차를 받쳐 든 채로 모시고 있었다. 그중 소매 없는 자색 홑옷을 입은 한 청년이 특히 눈에 띄었다. 아주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옥 장신구를 온몸에 걸쳤으며, 금칠로 그림이 그려져 있고 뼈대는 옥으로 되어 있는 명가의 부채를 잡고 손으로 흔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검은색 골패 두 장을 던졌는데, 몇 장 떨어진 곳에서도 동작 하나하나에서 방정맞게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쭐대며 뽐내는 것이 그야말로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3
초명윤은 잠시 그를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 저기 있는 귀족 자제는 어째 낯이 익는군요?"
소세예는 그의 시선을 따라 저쪽을 보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자는⋯⋯ 초당(楚黨)의 병부시랑 허인(許寅)의 외아들인 허동(許桐)이군요." 4
세상 물정 모르고 호강스럽게 자란 일부 귀족 자제들은 언제나 얼굴보다는 복장을 보는 게 알아보기가 쉬운데, 가면을 써도 넘쳐흐르는 패가망신의 기운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초명윤이 마음에 둔 것은 이게 아니었다.
"왜 굳이 초당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까?"
"초 대인께서 쉽게 기억을 떠올리실 수 있도록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소세예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초명윤은 그와 시시콜콜 말다툼을 벌이지 않은 채로, 노름판을 주시하며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곧 웃음을 지었다.
"만약 이 도박장에 정말 기이한 점이 있다면 제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다만 소 대인께서 불편하실 수가 있어 협력하실 의향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해도 괜찮습니다."
초명윤이 그의 귓가에 다가가 몇 마디를 소곤소곤 말하자, 소세예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으나 도리어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군요."
"정말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수고스럽지만, 초 대인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소세예는 주위를 흘끗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위치가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줄곧 탐색하는 시선을 조금은 받았다. 그는 뒤로 한 보 물러서고는 자그마하게 목소리를 냈다.
"공자께서는 잠시 마음을 놓으시지요, 저는 당연히 여기 왔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한테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초명윤은 웃음을 띤 채로 그를 힐끗 보았다.
"널 헛되이 아끼진 않았구나."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중앙에 있는 노름판으로 갔다.
이쪽은 공교롭게도 허동이 이겼다. 뒤에 있던 하인이 황급히 금으로 되어 있어 찬란하게 빛나는 산돈을 아낌없이 가져왔다. 그는 득의양양해졌고, 돈을 잃은 몇몇 사람들은 성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알랑거렸다.
"허 도련님은 오늘 정말 운이 좋으십니다!"
"어찌 오늘뿐이겠습니까, 요 며칠 동안 연승하지 못했던 적이 있기는 했습니까? 제가 보기엔 위로 초대되어 주인과 노름을 한판 벌일 수 있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서(徐) 도련님, 소원으로 뭘 말할지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 출세하여 부자가 되어도 아무쪼록 우리 형님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허동은 손을 내저었다.
"재미있게 놀았으면 되었지, 뭔 소원을 잘 생각해 두었겠습니까? 출세하여 부자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황제가 향락하는 데 쓴 비용을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저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게 어떻게 우리가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5
초명윤이 견디지 못하고 소리 내 냉소했다.
이때는 마침 허동의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아직 없어서 조금 고요해진 참이었기에, 초명윤의 냉소가 유달리 뚜렷하게 드러났다.
미간을 찌푸린 허동은 곧 언짢은 듯이 이쪽을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작가의 말:
주: 도박장에서 탈을 쓰는 설정은 '육소봉전기전전(陸小鳳傳奇前傳)'을 참고했어요.
원래 빌려 쓴 극락루는 이미 건의를 받아들여 문장을 바로 고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출처를 명시하면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했네요. 타당하지 않은 곳을 지적해 주셔서 감사해요, 뽀뽀 쪽 =3=
- 패구(牌九)란 32개의 골패(뼈로 만든 패)를 네 사람이 각각 네 개씩 가지고 패를 두 개씩 나눠 내면서 승부를 결정하는 도박을 말한다. [본문으로]
- 원문은 초명윤이 자신이 '不學無術'하고 '驕奢淫逸'인 사람인 것 같냐고 물어본다. '不學無術'은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음을, '驕奢淫逸'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방종하고 방탕하다는 말을 뜻한다. [본문으로]
- 도박장에서 화폐 대신 셈에 쓰이는 돈을 뜻한다. [본문으로]
- 병부시랑은 병부상서(兵部尙書)가 통괄하는 사시랑(四侍郞) 중 하나이다. 병부(兵部)는 과거에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시랑은 각 부서의 차장으로 상서(尙書) 아래의 지위를 뜻한다. [본문으로]
- 원문은 '逍搖自在'로,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아무런 구속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逍搖(소요)'는 도가(道家)에서의 이상적인 경지를 뜻한다. 흔히 고전문학 작품에서는 도가(道家)를 자유와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으로, 유가(儒家)를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으로 구분하여 서로 대립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잦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