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외에 만나고 싶은 이가 또 있으십니까
엄엽(嚴燁)은 진소를 따라 태위부로 들어서서, 길을 따라 구부러진 주홍빛 처마를 지나 서재로 향했다. 그는 길을 걸으며 관저의 풍채에 감탄하면서 몇 가지를 떠보며 물어봤지만 이 흑의를 입은 남자는 그에게 뒷모습만 보이며 '응'이라는 소리만 냉담히 낼 뿐이었다.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그는 씩씩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앞서 가던 진소가 걸음을 멈추고 느리게 서재 문을 열자 그는 재빨리 표정을 잘 갈무리했다.
초명윤은 붓을 들어 지도에 무언가를 그리다가, 발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며 엄엽을 멀리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 하러 온 건가?"
엄엽은 예를 표하고는 웃으며 답했다.
"하관은 대인께서 진 상서(尚書) 선생의 소식을 알아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조금 아는 것이 있어, 이리 서둘러 대인께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초명윤은 붓을 내려놓고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진현문의 가족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는가?"
"단지 조금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엄엽이 이어서 말했다.
"며칠 전에 하관이 명을 받아 임안(臨安)으로 갔을 때, 동 군수(郡守)와 작은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그가 진 상서 선생이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서 도움을 청하셨는지 모르겠다고 했었습니다. 전에 임안성 밖에 저택을 마련해서 진 상서 선생의 처와 자식을 모두 그곳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진 상서 선생께서는 많은 말을 하시려고 하지는 않았기에 그도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한밤중에 그 저택에 예상치 못하게도 불이 났는데, 그가 서둘러 사람을 보냈을 땐 이미 거의 다 타버린 뒤라고 했었습니다."
"한밤중에 불이 났다고?"
초명윤이 눈썹 꼬리를 살짝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군수가 어찌 감히 태만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사람을 보내 몇 번이나 조사하게 했는데, 인위적으로 방화한 흔적이 없기에 아마 저택 내의 촛불이 물건을 태워서 일이 터졌을 수도 있겠다고 했습니다."
"허."
초명윤이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조사를 해서 잡힐 수가 있다면, 방화한 사람이 진현문의 일가를 죽일 체면을 세우지도 않았겠지."
정탐하는 중에는 형식적인 요소가 확실히 많긴 했지만, 초명윤의 말투는 지나치게 비꼬는 면이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마에 식은땀이 미미하게 배어 나온 엄엽은 초명윤을 감히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웃음을 곁들이며 말했다.
"대인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 말은, 진현문의 일가가 전부 잿더미가 되었다는 건가?"
"그⋯⋯,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엄엽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음?"
초명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엄엽이 소매를 들어 식은땀을 훔치고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말했다.
"그, 그 군수도 추측한 것을, 하관도 전달했을 뿐,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명윤이 웃고는 느릿하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이리 떠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엄엽이 웃으면서 용기를 내고는 말을 이었다.
"한밤중에 마차가 그곳에 멈추었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마치 사람을 구해낸 것 같다고 하던데, 진 상서 선생의 외손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밤의 어둠이 너무 깊어서 똑똑히 보지는 못했답니다."
초명윤은 눈빛을 조금 거두고는 진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진소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다리고 있는 엄엽에게로 걸어가 임안에 한 번 다녀오라는 분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엄엽은 해야 할 말을 다 끝냈음에도 이런 식으로 떠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말했다.
"대인께서 진 상서 선생께 이렇게나 관심이 많으신데, 무슨 일이신지요? 하관이 비록 무능하나, 대인의 근심을 조금 덜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를 흘긋 본 초명윤은 기회를 봐서 빌붙으려는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딱히 아무 일도 없다만, 듣기로는 진현문의 손자가 생긴 게 나쁘지 않다고 하던데."
"⋯⋯."
엄엽은 눈앞에 있는 이 수치를 모르는 남자가 남색을 거리낌 없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원래 준비했던 말을 목구멍으로 삼킨 그는 할 수 없이 겸연쩍어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초명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나저나, 내 관저로 이렇게 찾아오다니. 소세예에게 발각되는 게 두렵지 않은가?"
"대인께서는 안심하시지요."
엄엽이 재빨리 말했다.
"어사대부께서는 지금 어사대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자리를 비우신 후에 제가 대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오?"
초명윤은 조금 흥미가 돋았다.
"소세예는 어디로 갔지?"
"누군가가 공부상서 담경이 관청의 선박으로 밀매를 하는 것을 적발했습니다. 화약을 운송한 일이라던데, 지금 어사대의 상소는 모두 소 대인의 눈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대인도 아실 겁니다. 이 일은 중대합니다. 만약 거짓이라면, 조정의 관리에게 커다란 오점을 뒤집어쓰게 하는 것이니 우리 어사대가 사무를 부당하게 처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진짜라면, 직접 상소를 제왕께 넘길 때 상대방이 미리 알아채고 경계하게 됩니다. 소 대인께서는 일단 상소를 덮어 놓으셨는데, 대인의 성정을 보면 아마도 직접 조사하러 가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초명윤의 안색이 미미하게 차가워졌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담경이 화약을 운송하는 게 적발되었다고?"
진소의 얼굴빛도 변했지만, 엄엽은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엄엽은 그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조금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말하고 보니 이상하긴 합니다. 담 상서께서 관청의 선박으로 밀매를 하신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원래는 행동을 삼가시는 편이라 저희들도 굳이 말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큰 배 몇 척에다가 화약을 싣고 들어왔습니다."
초명윤은 손 끝으로 가볍게 탁상 위를 두드렸는데, 눈빛이 일정하지 않게 반짝였다 어두워졌다 했다.
그와 담경의 화약 거래는 진작에 끝난 상태였다. 서쪽 교외가 폭발해서 적절하게 일어난 산사태는 모든 것을 하나도 남지 않게 묻어버렸다. 사건이 끝났는데도 담경이 지금 또 이렇게나 많은 화약을 손에 넣다니, 이건 어찌 된 일인가? 설마 이 수도에 아직 부정한 수단을 쓰려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직접 조사한다고 했는데, 소세예는 조사를 어떤 방법으로 하려고 하지?"
엄엽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 적발 내용이 적힌 상소는 하관이 보내면서 한 번 봤었는데, 담 상서의 측근이 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서쪽 시장의 곡물 창고 안에 그와 화약을 가지려는 사람이 주고받은 각종 장부가 있다던데, 소 대인께서는 가셔서 그 장부를 입수하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초명윤이 손바닥을 뒤집어 지도를 닫고는 몸을 일으켜 긴 옷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되었다. 이제 가 보거라."
"예?"
엄엽은 놀라 허둥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초명윤이 눈꼬리로 흘겨보더니 말했다.
"직접 바래다 주기까지 해야 하나?"
"감히 그럴 리가요."
엄엽은 이어서 목소리를 거듭 냈다.
"다만⋯⋯, 대인께서는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갑자기 소세예가 조금 그리워져서 만나러 간다."
초명윤이 대답했다.
"⋯⋯ 아?"
하지만 두 분께서는 방금 조회에서 만나시지 않으셨잖습니까? 1
초명윤이 성가시다는 듯이 그를 흘겨보자, 엄엽이 황급하게 입을 열어 정중히 사양하고는 눈치껏 스스로 가버렸다. 초명윤과 진소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관저를 나서서 몸을 돌리며 말에 올라 곧장 서쪽 시장으로 갔다.
담경과 화약을 넘겨받을 때 진소가 장소에 갔었기에 물론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창고는 장안의 서쪽 시장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온갖 잡초가 마구 자랐고 영락한 데다 무너진 것이 오랫동안 폐기된 채로 버려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안의 삼엄한 경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진소가 들어가겠다고 말을 꺼냈으나, 초명윤의 '네가 소세예랑 맞설 수 있다고?'라는 한 마디에 울적해져서 도로 말을 삼켰다. 초명윤은 창고 내의 배치와 장부의 위치를 명확하게 묻고는, 소세예가 한 걸음 먼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진소에게 영위를 이끌고 둘레에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분부했다. 그 후 초명윤은 발 끝을 딛고는 몸을 돌려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은 아주 고요했는데, 때때로 지나가는 순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초명윤은 날렵하게 몇 번이나 대열을 이룬 순위들을 피해 가고는, 마음속으로 지형을 가늠하면서 장부가 있는 방으로 잠입했다. 오동나무 서랍에는 작은 구리 지물쇠가 아직 온전하게 걸려 있었다. 한번 훑어본 초명윤이 주전자 손잡이처럼 생긴 황동 손잡이를 시원스레 손으로 쥐고 옆으로 당겼다. 열린 서랍은 안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소세예가 한 걸음 더 선수를 치고 있군.
몸을 곧게 핀 다음 미간을 문지르면서 방을 나선 초명윤이 생각을 좀 하다가, 몸을 돌려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백 걸음도 지나지 않아 사람의 숨소리를 어렴풋이 알아챈 그가 바로 낮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따라 걸어갔다.
소세예는 창고 문을 밀어젖히다가 발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곧이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검의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차갑게 갈랐으나, 그 아래에 있던 사람에게 손목을 잡혀서 제지당했다. 시야 속에 가까스로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 들어왔다. 반 촌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 아래에서 칼날과 맞닥뜨린 그는 웃음을 드러내며 말했다. 2
"오, 소 대인."
소세예가 약간 의외라는 듯 말했다.
"⋯⋯ 초 대인?"
그는 손을 빼서 몸 뒤로 돌리면서 검을 다시 손바닥으로 감추어 칼날을 거두었지만, 경계를 놓지 않은 채로 말했다.
"방금 제 뒤를 따라온 사람이 당신이셨어요?"
"저 외에 만나고 싶은 이가 또 있으십니까?"
초명윤이 눈썹과 눈을 휘면서 웃었다.
"초 대인께서 어째서 여기에 나타나실 수 있는 겁니까?"
소세예가 물었다.
"그대를 위한 게 아니겠습니까?"
초명윤이 그를 보면서 짐짓 한숨을 쉬고는, 이어서 느릿하게 말했다.
"좀 전에 길에서 무심코 소 대인의 모습을 얼핏 봤습니다.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당신이 사라져서 할 수 없이 따라온 겁니다. 제가 이렇게나 고생하면서 찾아온 것은 당신과 다시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을까 싶어서였습니다. 이렇게나 경계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가 더욱 깊은 웃음기를 띄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방금 제가 느렸더라면, 아마 그 검이 이마를 꿰뚫고 지나갔을 겁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초 대인께서는 전장에서 전투를 하신 적이 있는 데다가 저의 이 호신하는 작은 재주를 전혀 동요 없이 막으셨는데, 만약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세예가 담담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으면서 소매 속에 감추었었던 검을 다시 소매 안에 거둬들였다.
"하지만, 초 대인께서는 단지 저와 몇 마디를 나누기 위해서 이리 따라오신 겁니까? 듣자하니 평소에 하시는 태도랑 정말 다르십니다."
"저는 당신에게 상사병을 앓고 있습니다. 기회를 찾아 당신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
소세예가 눈썹을 찌푸린 채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초 대인⋯⋯, 저 같은 일개 남자를 희롱하는 게 거북하지도 않으십니까?"
초명윤은 눈썹 끝을 미미하게 치켜세우고 말뜻에 농담을 담아 말했다.
"저는 기분이 아주 좋은데요. 더군다나 저의 이 일편단심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진심에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장난이라고 여길 수⋯⋯."
"제가 실언했습니다."
소세예가 손을 들어 말을 끊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창고로 들어갔다. 하지만 몸 뒤에서 같이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세예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꼬리를 샐쭉거리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한숨 쉬듯 '웬수'라는 두 글자를 내뱉었다. 3
"그러고 보니,"
소세예가 갑자기 물었다.
"초 대인의 어께에 있던 상처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거치적거리지 않은 지 오래됐습니다."
초명윤을 창고 문을 닫고는 몸을 돌려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리 와서 만져보시겠습니까?"
소세예는 고개를 돌리면서 그의 어깨를 스쳐 보고는 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필요 없습니다. 살갗에 입으신 상처는 초 대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얼굴 피부까지도 이렇게나 두꺼울 수 있으니까요.
초명윤은 소세예의 말에 숨은 뜻을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알아들었다.